고스게 신사는 메이지시대의 신불분난 때까지 신기진언종(新義真言宗)에 소속된 고스게잔간류지(小菅山元隆寺)로 불려, 일찍이 도카쿠시와 이즈나와 함께 기타시나노의 3대 수험장으로서 강성하였다. 창건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라이유키(来由記)에 의하면 불법을 알리는 데 걸맞는 토지를 구하여 제국을 돌던 수험도의 조상 엔노오즈노(役小角)가 고스게산을 찾게 되어 하쿠호8(680)년에 고스게산을 개산하였고, 다이도년간(806~810년)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이 토지를 방문하여 핫쇼곤겐본당(八所権現本宮)과 가야키리당(加耶吉利堂)을 재건, 그 밖에 수험사원인 고스게잔 간류지를 창건. 이것이 고스게 신사의 기원이다. 고스게권현(마다라신)을 모시고, 더욱이 구마노, 긴푸, 하쿠산, 다테야마, 산노, 하시리유, 도카쿠시의 칠주 신들을 권청하여 핫쇼의 궁전을 석굴내에 모셨다는 기술이 남아 있다. 또 헤이안시대 후기에는 본지수적사상이 정착되어 구마노 수험이 들어와 고스게산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 후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고스게 일대는 남조의 다카나시 세력과 북조의 이치카와 세력에 접해 있었는데, 남조당의 다카나시 씨가 역습을 받아 고스게에서 참패. 그 후 무라마치 막부의 지배가 안정됨과 함께 고스게산은 수험령장으로서 강성기를 맞이하여, 4년의 세월에 걸쳐 간류지의 궁사방중사관(宮社坊中寺観)을 재건, 욱사내 궁전의 건립과 동죽봉황문투조욱사 와키다치 이면이 제작되어 있다. 즉, 무라마치시대까지 고스게산에서는 조영이 빈번하였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할 만큼 번영하였다고 추측된다.
전국시대에 들어서 시나노 전역이 우에스기와 다케다의 쟁패 무대가 되었고, 고스게산 일대는 우에스기의 비호 아래 놓여 있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합전에 맞섰을 때에는 필승기원의 원문을 바쳤다. 그러나 그런 번영도 에이로쿠10(1567)년 가와나카시마의 전투까지의 일. 이 싸움에서 우에스기 군은 패배하여, 다케다 군세에 의해 간류지는 불타고, 본당을 제외한 당탑은 죄다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다케다를 멸망시킨 오다의 지배시기를 거쳐, 고스게는 우에스기 경승령이 되어 정세가 안정되면서 욱사본전이 재건되었다.
에도시대가 되면서 욱사참도의 삼나무 거리와 많은 종교건축이 정비되었고, 영장으로서의 고스게의 통치는 영주의 비호 아래에 있는 사원에서 마을 사람들에게로 옯겨졌다. 제례의 성격도 종교적인 것에서 참배자에게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유악적, 관광적인 성격이 더해진 것으로 바뀌어 간다.
에도시대를 지나 메이지에 접어 들면서 신불분난에 의해 다이쇼인 별당직이 신직에 임하여, 불식집기를 보리원에 이관하는 반면, 고스게사 핫쇼대신이 되어 메이지33(1300)년에는 고스게 신사라 개칭하였다. 오늘날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고스게 신사가 성립된 것이다.
세키자와 시적의 고스게로의 오르막 입구에 있는 커다란 목조 도리이가 「니노 도리이」. 앞의 것에는 고스게 신사의 석주와 대등롱, 고마이누가 놓여 있고, 실질적인 참배로 입구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치노 도리이」는 치쿠마가와 좌안의 오제키바시의 소매부, 도키와지구 오쿠라사키의 지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현재의 중심지와는 2km의 거리이다.
마을 중심을 동서로 뻗은 참배로를 끼고, 남북에 남용지 자리와 이궁의 숲이 위치해 있다. 이궁 사전은 1660년에 이야마 성주 마쓰다이라에 의해 개축된 것. 현재의 건물은 모두 다이쇼12(1923)년에 크게 개수되었다. 사지에는 석단을 올라 신악전(배전) 오른쪽에 3년에 한 번 있는 하시라마쓰사이토(柱松柴灯) 신제 때 메여지는 신여(미꼬시)가 보관되어 있는 신여전, 왼쪽에 신마전이 있다.
니노 도리이에서 좌우로 밭이 펼쳐진 급경사로를 오르면 처음 나타나는 사전이 팔작지붕의 인왕문. 원래는 인왕당이라 불렸고, 양쪽에는 17세기 후반에 간류지의 서대문으로서 지어진 건물로 양쪽에는 금강역사의 상이 모셔져 있다. 인왕존당의 별칭인 점에서, 현재는 문의 기능이 아닌 건각의 신인 인왕존을 모시는 당으로 쓰여 짚신 등이 봉납되어 있다. 메이지시대 초기에 발령된 신불분난령에 의해 다이쇼인이 폐사(고스게 신사로 이행)되고, 많은 당우가 파각된 중에도 예전과 같은 위치에 있는 유구로서 귀중한 존재이다.
이궁 옆에 지어진 강당은 원래는 간류지의 중원에 속했던 것이었다. 부근에는 남대문과 중문, 금당 등이 있었으나, 전국시대 때 다케다의 침공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이 강당도 1697년에 이야마 성주 마쓰다이라에 의해 복구되었다. 안에는 아미다여래삼존불상이 안치되어, 3년에 한 번 7월 중순에 하시라마쓰사이토 신제가 그 앞 제식장에서 봉납된다.
최고 번성기에는 상원16방, 중원10방, 하원11방 합계 37방이 있었고, 100의 미원 6사 5당이 즐비하여, 수험, 산복, 승려가 300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지는 간류지. 그 총괄을 했던 것이 다이죠인이다. 현재는 간류지 별당 다이쇼인의 유적지에 호마당이 지어져, 하시라마쓰 행사 출발점을 비롯, 화구 태우기 신제도 호마당 옆에서 열린다. 건물은 1750년에 재건한 것.
또 훌륭한 석벽은 「다이쇼인 이시가키」라 불리어, 에도시대 말기 오다이바를 만든 지역의 장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커다란 돌을 사용한 매화문양식이 멋지다.
관음당은 시나노 33번 관음령장 순례의 제 20번 예소로 내방객도 많다. 일찍이 고스게산 중턱에 있었는데 현재의 장소로 옮겨서 보리원의 관리를 받고 있다. 보리원은 원래는 다이쇼인의 산내사원 중 하나인 사쿠라모토보. 교호원년에 중흥개기되었다고 하는 신겐슈부잔(真言豊山)파의 사원이며, 대일여래가 본존. 메이지시대 폐불훼석 때, 다이쇼인은 고스게 신사가 되어 사쿠라모토보가 불교사원 보리원으로 남겨져, 다이쇼인의 불교관계 집기를 옮겼다.
유서 깊은 고스게에는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엔무스비(인연 맺음)」
어느날 가가의 왕께서 고스게 신사에 참배를 드리러 왔다가 아름다운 처녀에게 반해 왕비로 들였습니다. 얼마 후 보석 같은 아이를 얻게 되어,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이것은 마두관음의 은덕이다」라 하여, 순산의 예로 대반야경 육백권을 기증하였다. 그 후, 고스게 신사는 인연을 맺어주는 신으로서 지역 사람들에게 숭배되었고, 고스게 신사를 참배하면 결혼하게 된다는 평판이 돌아, 특히 여성 참배객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참배로 도중에는, 고보대사 공해도 걸어서 다리를 건너면 행복해 진다는 「유메노 카요히바시」와 연애성취를 이루어 준다는 애염명왕을 모신 「애염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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